“missed connections”: Richard Kennedy

전시소개

 

조현화랑-해운대에서는 2020년 2월 19일부터 3월 22일까지 리차드 케네디 (Richard Kennedy) ‘missed connections’ 개인전을 개최한다. 리차드 케네디는 뉴욕을 거점으로 현대미술, 작곡, 오페라 각본 및 연출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발한 활동으로 주목받고 있는 젊은 현대 예술가이다. 이번 전시는 ‘관객이 없는 오페라’를 제작하는 과정에서 파생된 총 8점의 회화 작품을 선보인다. 작가는 백인 중심 문화인 오페라를 통해 미국 사회에서 자신과 같은 흑인, 그리고 성 소수자의 삶을 은유적으로 표현하고자 한다.

 

리차드 케네디는 미국 오하이오주 미들타운에서 유년시절을 보냈으며,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소그 오페라 하우스 (Sorg Opera House)에서 공연을 관람했다. 당시, 2달러짜리 드레스 리허설로 볼 수 있었던 오페라에 빠져 이후 오페라가 가진 다양한 기호들의 상호작용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극의 서사, 시적인 가사, 가수의 가창력, 아름다운 음률, 시대를 대변하는 의상, 그리고 웅장한 무대장치 등이 서로 관계를 맺음으로써 오페라는 완성된다. 작가는 오페라를 사랑하는 이유로 오페라의 구조 안에서 자신이 수많은 사람들의 역할을 경험하고, 이를 통해 새로운 세상을 창조해 낼 수 있다고 말했다.

 

베를린 페레스 프로젝트 (Peres Projects)에서 리차드 케네디는 회화 작품, 영상, 조각과 같은 다양한 재료를 통해 ‘관객이 없는 오페라’를 주제로 한 전시, (G)hosting을 선보였다. 보통 오페라를 생각하면 먼저 관람객은 자리에 착석하고 공연을 관람하고, 웅장한 배경음악과 함께 화려한 의상을 걸친 배우들이 등장하는 장면을 상상한다. 그러나 작가는 오페라를 선보이기에는 다소 독특한 장소인 갤러리를 무대로 선정하여, 낯선 사람과의 ‘첫 만남’ 같은 오페라를 선보였다. 무대 위가 아닌 화이트 큐브 전시장에서 실현된 이 오페라는 펜스와 그 위에 걸쳐진 모니터, 조각, 그리고 페인팅으로 구성되었다. 모니터에서 흘러나오는 기이한 불협화음은 관람객들을 더 긴장시키며, 조각과 그림은 그들의 시각을 자극하고 불안감을 증폭시킨다. 또한, 여러 방향으로 유도하는 펜스들 사이를 관람객들은 다양한 방향으로의 동선을 스스로 결정하며 관람할 수 있다. 이러한 열린 전개로 진행되는 오페라는 관람객들을 전 혀 다른 방향으로 이끌며, 새로운 ‘첫 만남’을 찾도록 유도한다.

 

이번에 전시되는 회화 작품은 관객이 없는 오페라 시리즈 ‘(G)hosting’을 만들어내는 과정에서 파생된 오페라의 리브레토 (liberetto, 오페라의 대본)를 표현하였다. 리브레토와 같은 회화 작품들을 작가는 페인팅이라는 매체를 통해 리브레토의 세계를 물리적으로 창조해냄과 동시에 새로운 코드를 만들어냈다. 그림은 오페라의 분위기를 고조시키는 무대 장치, 음악을 더욱 풍부하게 하는 코러스로 이야기를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제공되는 시놉시스처럼 극을 전달하는 하나의 매개체이다. 또한 작품에 등장하는 텍스트는 성 소수자 공동체가 사용하는 언어이자, 매스컴의 검열을 피하기 위해 추상화된 코드이다. 이 언어들은 표백되어 때로는 읽고, 이해하기가 어렵다. 각 텍스트들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하나의 캐릭터처럼 자신만의 글씨체와 크기를 가진다. 춤은 붓 없이 그림을 그리는 행위라고 표현하는 작가에게 그림이란 캔버스 표면에 박제된 춤의 잔상일 것이다. 독특하게도 그는 테크노 음악에 맞춰 춤을 추며 캔버스 위에 페인트 레이어를 한 겹 한 겹 쌓아올리며, 반복적으로 텍스트를 써나간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큰 붓을 이용해 캔버스 전체를 쓸어내린다. 이 마지막 과정을 통해 관람객과 그림이 전달하는 메시지 사이에 경계, 일종의 막이 형성되는 것이다. 그림과 텍스트를 제작하는 이 수고스러움은 성 소수자 공동체가 사용하는 언어의 상황을 은유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작품 속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문구들은 리브레토를 반복해서 읽는 행위와 같이 오페라 공연의 연습과 무대 위 실전의 경계를 환기시킨다. 한 사람이 같은 단어를 반복했을 때 억양, 톤, 목소리의 크기 등 여러 감정에 의해 다양한 차이가 존재하는 것처럼 리허설과 달리 정해진 시간이 있는 공연에서는 무수히 반복된 연습을 통해 정제된 단 하나의 주체와 정체성만이 무대에 오른다. 그러나 리차드 케네디의 작품에서는 확실한 주체나 정체성이 아닌 불안한 존재감으로 나타나며, 작가는 이로써 결정적인 발화는 과연 존재하는지 또한 그것을 결정하는 기준이 있는지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그의 작품을 통해 그림이 발화하는 것인지 발화를 유도하는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은연중에 혹은 의도적으로 보는 이의 참여를 유도하는 그림이다. 보는 이의 감각을 일깨워주지만, 기준을 세워주지 않고 중심에서 미끄러지고 가치판단을 지연시키는 것이다.

 

리차드 케네디는 자신의 작품이 국적, 인종, 성 정체성의 새로운 형상을 제시하기보다 작품을 보는 관람자가 그림과 텍스트를 관찰하고 발화하는 행위를 통해 다양한 방향성으로 전개될 수 있는 삶의 잠재력을 호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