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seph Beuys: 요셉 보이스

조현화랑에서 전시되는 작품들은 2008년 10월 ‘이화 여자 대학교 이화 아트센터’에서서 ‘보이스 심포지움’과과 함께 개최되었던 작품들이다. 또한 베를린 국립 현대 미술관 ‘함부르거 반호프’에서 ‘2008년 10월 3일-2009년 1월 25일’ 까지 개최되었던 ‘예술가 숭배-보이스’ 회고전에 맞추어 기획되었다.
보이스의 사망 20주년인 2006년에 ‘독일 현대미술 단면전-전북 도립 미술관’
전시로 한국에 소개 된 보이스의 작품들은 당시 2006년 ‘보이스의 방’으로 꾸며졌었으며 뮌헨 ‘Edition Schellmann’ 과 하이델베르그 ‘Edition Staeck’ 에서 들어왔던 작품들이다. 그 당시 작품의 소장자 들은 보이스의 제자들로 1960년 초반부터 함께 활동한 작가들 이었다 이화화여대 전시 기간 중에 ‘보이스스 심포지움’에 초대되어 내한 한한 ‘함부르거 반호프’ 미술관 관장인 Dr. Eugen Blume 는 유럽에서 ‘보이스’의 최고의 권위자 이시다.

보이스의 작품세계는 보이스 개인의 사고와 체험이 매우 깊이 관련되고 유럽 문화의 맥락 속에서 형성되었지만, 그의 작품세계는 생명의 근원에 대한 깊은 관심, 자연에 대한 숭배, 물질과 비 물질의 구분을 초월하여 모든 것을 포괄하는 이상주의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사고가 동양의 정신과도 깊이 맞닿아 있었음을 깨닫게 한다.
 
이번 전시는 3가지 테마 – ‘토끼방’, ‘펠트’, ‘동독에서 온 생필품들’로 구성되었다
 
A) 토끼방
보이스는 샤머니즘적 경향 및 인지학(Anthroposophie)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자신의 문화적 경험을 바탕으로 치유방식으로서 특정대상에 대한 ‘동일시’와 상징을 활용하여 작업과정을 조형예술 어법으로 실현하고 있다. 순환성, 포용성, 유동성, 따뜻함은 인간과 동물, 사회와 세계에 대한 유기적 커뮤니케이션은 보이스의 주된 관심사였다. 또한 전설과 민간 신화에 대한 관심은 동물 이미지를 통하여 나타난다. 특히 연금술적인 전환과 화학적 변화를 상징하는 토끼는 보이스가 가장 빈번히 사용하며 자기 자신과 동일시 하였던 동물이다.
자연계에 대한 토테미즘적 해석은 일반적 관념의 물질개념을 한층 너머서고 있다.
 
B) 펠트
보이스에게 펠트는 열의 저장소이며, 에너지를 생산하는 발전소, 그리고 “따뜻함’의 사상을 드러낼 수 있는 상징적 매체이다.
물체를 싸매는 작업은 사회를 보온하고 보호하는 치유과정들이며, 예술이 치료에 효과적이라는 보이스의 믿음이 하나의 개념으로 보여주는 작업들이다.
‘펠트 천’ 자체도 치료물질로 사용되었던 것이며, 보이스는 펠트로 물체들을 싸고, 자기 자신도 전쟁 중에 ‘펠트’로 싸여졌었다.(타타르족의 치료)
 
C) 동독에서 온 생필품들
보이스의 작업들 가운데 동독에서 온 생필품들은 인류학자들의 문화적 발굴에 대한 태도와 유사한 특징. 자신의 문화적 경험을 바탕으로 한 상징들을 재 발굴하고 전시하는 전략을 사용하고 있다.
그의 작업은 작업자체의 작품, 혹은 예술품을 만들어 낸다는 의미보다는 예술가로서 컨텍스트로서의 문화, 행위, 언어, 물질들의 제시를 통한 커뮤니케이션의 사회적 의미에서 읽어가야 한다. 예술가만이 역사에서 창조적인 요소를 경험하는 것이며, ‘역사는 조각처럼 보여지고 인간의 사상은 사람내면에 만들어지는 조각 이다’ 라고 정의한다. 따라서 그의 사회 치유, 사회 변혁적 관점은 사회조각의 실천적 행위를 가능케 하며 동독에서 온 소포 포장지를 8년 간에 걸쳐 수집하며 발굴한 동독의 생필품들은 당시 분단국가에서 예술가로서의 기존의 예술문맥에서 벗어난 예술개념이다. 그의 관심은 예술행위를 통해 포괄적으로 문화, 역사, 사회구조의 문맥을 관통하는 데 있으며 박제화된 미술작품의 존재가 아닌 물질적 작품의 설정을 계기로 유발되는 깊은 사고의 발전과 그 의미에 대한 관객과의 소통에 있다.
동독에서 사용하던 생필품의 포장, 디자인은 당시 서독인에게는 매우 소박하고 촌스러운 옛 향수를 불러오는 이미지였다. 통상적으로 이해되는 예술과 반 예술을 모두 포용하는 예술언어와 혁명적 사고는 현대미술의 개념을 전복시킨 마르셀 뒤샹과 앤디워홀을 뛰어넘었다. 당시 이 작품들은 유럽에서 순회전시가 되었으며 1977년 카셀도쿠멘타에서 100일동안 ‘심포지움’과 ‘토론의 장’을 개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