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m Hong Joo I PRESS RELEASE
2025년 9월 2일 (화) - 2025년 11월 16일 (일)
조현화랑_서울, 서울특별시 중구 동호로 249 신라호텔 B1
화 – 일 10:30–18:30
조현화랑_서울은 2025년 9월 2일부터 11월 16일까지 김홍주 개인전을 개최한다. 김홍주(1945–)는 1970년대 ST 그룹 활동을 시작으로 ‘극사실’ 회화, 서체 회화, 구상적 이미지 등을 거쳐 현재에 이르기까지 회화의 조건을 탐구해 온 작가다. 그의 궤적은 단순히 양식의 전환이 아니라, 회화가 성립할 수 있는 기반을 각 시기마다 다른 언어로 실험해온 과정이었다. 이번 전시는 이러한 오랜 탐구의 연장선에서 최근의 신작과 더불어 과거 작업을 다시 호출하며 회화의 본질적 가능성을 점검한다.
전시는 회화 작품 6점과 조각 작품 6점을 선보인다. 회화는 번짐과 선 긋기, 흐름과 중첩이라는 서로 다른 작법이 병치되고 의도와 우연이 교차하는 회화적 긴장을 드러낸다. 여기에 버려진 사물을 토대로 물감을 덧입힌 조각은 그러한 회화적 사유를 입체의 형태로 연장한다. 회화와 입체는 매체의 차이를 넘어 동일한 태도의 변주로 읽히며, 고정된 형상이나 도상을 제시하기보다 남겨진 흔적과 과정 자체를 노출시킨다. 화면과 사물은 감상자가 이를 형상적으로 이해하려는 관습을 차단하면서, 색채와 물질의 관계 속에서 스스로 감각하고 사유하도록 이끈다.
회화는 오랫동안 형상에 대한 집착 속에서 발전해 왔다. 무엇을 그렸는가, 그것이 무엇처럼 보이는가 라는 질문은 회화를 설명하는 가장 익숙한 언어이자 동시에 벗어나기 어려운 습관이었다. 형상을 붙잡으려는 경향은 회화를 끊임없이 표상의 차원으로 되돌려 놓았고, 작품은 종종 내용을 전달하는 그릇으로 환원되곤 했다. 그러나 김홍주의 회화는 이러한 습관에 정면으로 저항한다. 그는 특정 대상을 붙잡아 의미로 고정하기보다 대상을 성립시키는 조건 자체를 지워내며 회화의 가능성을 모색한다. 발생-조건-체험-지각 네 단계의 고리를 순환하며, 그의 그림은 ‘무엇을 그렸는가 ’라는, 회화를 특정한 대상을 모사하는 일로 환원해 온 질문을 해체하는 실천으로 전환된다.
오늘날 이미지는 폭발적으로 증식하며 소비되고, 그 과잉은 회화를 재현의 언어로 되돌려 세우려는 듯하다. 이 같은 시대착오적 반복은 시각성의 새로움을 요구하는 역설적인 국면이다. 한때 포스트모더니즘이 제기했던 테제—재현을 의심하고, 어떻게 볼 것인가를 묻는 것―은 여전히 유효해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과거 담론의 되풀이가 아니라, 지금의 과잉 속에서 회화가 의미를 다시 발굴할 수 있는 토대를 확인하는 계기가 된다. 그 옛날, 마르틴 하이데거가 『예술작품의 근원』(1935-1937)에서 말한 ‘진리의 발생’ 을 상기시켜 볼 필요가 있다. 진리는 완결된 의미로 고정되지 않고, 드러남과 은폐가 교차하는 순간 속에서 솟아오른다. 회화와 재현이 여전히 등치 되는 오늘의 상황에서, 김홍주는 그 틀을 해체하며, 발생으로서의 회화가 어떤 조건 위에서 가능한가를 탐색하고자 한다.
잠시, 이 글은 미리 일러두기를 제시한다. 그의 그림을 구체적으로 무엇을 그린 것, 무엇을 표현한 것이라 직접적으로 언급하기는 불가하다. 다만 파란색, 붉은색, 초록색처럼 특정한 색조가 화면의 주조를 이루고 있다는 식, 혹은 그가 캔버스 천 위에 물을 가득 먹힌 얇은 붓으로 선을 쌓아가며 그림을 완성했다는 등의 묘사를 통해,
그림에 대해 간접적으로 지시할 수 있을 뿐이다. 언어적 우회, 즉 색조, 분위기, 작법을 경유해 서술하는 방식은 일종의 곁을 맴도는 기술이자 외곽에서의 조망이라 할 수 있겠다. 이러한 ‘간접적인 말하기’ 가 그의 작업을 설명하는 적확한 경로가 된다는 점은 그의 그림이 쥐고 있는 핵심을 비춘다. 명확한 도상으로 고정하지 않고, 회화가 진리를 드러내는 사건으로 작동하도록 두는 것. 우선, 그것이 그의 작업 앞에서 유효한 이해의 문턱일 테다.
파란색이 주조를 이루는 〈무제〉(2021)에는 두 개의 서로 다른 형상이 맞서 있다. 왼쪽에서는 물에 닿은 안료가 아래로 고르게 번지며 커다란 덩어리로 남고, 오른쪽에서는 세필의 반복된 선들이 수평의 결을 이루며 화면을 채운다. 번짐과 선 긋기라는 상이한 작법이 한 화면 안에 공존하면서 의도와 우연이 맞물리는 긴장이 떠오른다. 조절되지 않는 물감의 흐름은 작가의 손을 벗어난 자국으로 남지만, 그 옆에서 굵기와 색감, 시작과 끝까지 의도된 선의 배열은 분명히 작가의 개입을 증언한다. 이 두 층위는 대립하거나 상쇄되지 않고, 화면 속에서 서로를 지탱하는 이중의 구조로 작동한다.
붉은색이 주조를 이루는 〈무제〉(2024)는 다른 방식으로 같은 문제를 변주한다. 회색조(실제로는 여러 색이 혼합된 중성색) 형상의 한쪽 위에서 아래로 번져 내려오며 점점 넓어지는 붉은 형상이 자리한다. 이는 캔버스 천에 미리 칠해둔 물 위에 안료를 얹어 흘려 보낸 결과로, 중력과 시간의 흔적이 화면 전체에 각인된 것이다. 붉은 형상의 외곽에는 앞선 파란색의 〈무제〉에서처럼 세필로 짧게 그어진 선들이 둘러서며 번짐과 결을 병치한다. 이처럼 그의 회화는 특정한 형상에 화면을 고정하지 않는 방식으로, 색과 물질이 흐르고 겹치는 과정 자체를 보여주면서, 회화의 성립 전제를 언제나 작가의 의도와 의도하지 않은 것 사이에서 사건처럼 발생시킨다. 이 발생은 곧 사유의 조건에 관한 탐구로 이어진다. 김홍주의 화면은 구체적인 형상에 관한 독해를 끊임없이 밀어내며, 도상학이나 도상해석학 같은 이미 정해진 범주의 읽기가 뚫고 들어갈 자리를 허용하지 않는다. 꽃처럼 보이지만 결코 꽃은 아닌 형상, 무엇처럼 보이다가 이내 흩어져 버리는 흔적들은, 관습적 이해를 좌절 시키는 모종의 방해물로 작동한다. 이는 선험적 지식을 무력화하는 장치이자, 감상자가 스스로 사유하도록 이끄는 조건이다. 나아가 그는 버려진 것을 버리지 않고 덧입히는 방식을 통해, 이미지의 작동 근거를 쓸모없어 보이는 것 속에서 재발견한다. 하이데거가 말한 ‘발생’ 이 진리의 출발점이라면, 김홍주의 작업에서 그것은 감상자를 자기만의 사유로 이끄는 조건적 방해의 형식으로 변주된다.
그의 회화가 전개되는 양상은 그가 입체적인 사물에 접근하는 태도에서도 동일하게 확장된다. 이번 전시에 놓인 〈무제〉 세 점은 흔히 조각이라 불릴 수 있겠지만, 보다 정확히는 그의 관점이 응축되어 나타난 하나의 표현이다. 모두 버려진 사물을 주워와 토대로 삼고, 캔버스 회화에 쓰고 남은 물감을 덧붓거나 흩뿌려 완성되었다. 그중 가장 부피가 큰 작품은 (이 또한 회화처럼 그것이 무어라고 형용하는 것이 유용하지 않기에 서술하기를 지양하며) 안으로 뚫린 검은 원형 받침 위에 인체 형상을 닮아 서 있는데, 위에서 아래로 흐른 물감이 옷자락처럼 표면을 타고 내려오며 스스로의 윤곽을 지운다. 두 개의 작은 작품은 각각 윗면이 막힌 물체 위에 얹혀 있으며, 하나는 굳은 물감이 울퉁불퉁하게 응고해 녹아내린 듯이 보이고, 다른 하나는 그보다 조금 더 채도가 낮은 색의 물감이 얹어져 차이가 드러나는 인상을 남긴다. 쓸모없음으로 간주된 사물 위에 물감을 얹어둔 이 결과물들은, 회화와 마찬가지로 남겨진 흔적과 과정을 통해 사건으로 발현된다.
이러한 회화와 조각의 방식은 사건 그 자체이자 사건을 불러내는 매개로 감상자 앞에 놓인다. 화면이나 오브제 위에 남겨진 흐름은 조형적 구성의 의도를 떠나, 감상자가 그것을 마주하는 경험 속에서 재작동시킨다. 이는 상호적 체험의 층위로 이어진다. 조르주 디디 위베르만이 말했듯, 이미지는 우리가 그것을 보는 동시에 우리를 응시한다. 그러므로 이미지 또한 우리를 끌어들이는 장(場)이 된다. 김홍주의 회화 앞에서 감상자는 더 이상 무엇인가를 인식하려 애쓰지 않고, 색채의 장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예를 들어, 빨간 색조의 어떤 원형상의 그림은 주황과 분홍, 여러 겹의 색이 중첩되며 응시를 분산시킨다. 화면은 꽃도 태양도 아닌 채로 우리를 붙잡고, 감상자는 의미를 해독하는 대신 색의 중첩과 번짐 속에서 길을 잃으며, 길 잃음은 곧 체험의 낯섦으로 변한다. 이 막다른 길목에서, 우리에게 남겨진 물음은 김홍주의 회화는 무엇을 그렸는가가 아니라 그 앞에 선 ‘나’의 감각이 어떻게 낯설어질 수 있는가일 뿐이다.
그 체험은 이제 감상자의 자리에서 지각의 차원으로 옮겨진다. 그는 생천에 바인더를 칠하거나 그대로 두고, 그 위에 물감을 얹으면서 일부러 천과 물감의 물리적 접촉을 노출시킨다. 두껍게 덮어 형상을 완성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붓질의 흔적과 표면의 결이다. 한편 이번 전시를 위해 소환된 〈무제〉(2002)는 오래 전부터 현재의 전환을 예고하고 있었던 듯하다. 캔버스는 구름처럼 보이는 형상을 담고 있으나 작가는 그것을 “구름이라기보다는 무엇처럼 보이는 것” 이라 말한다. 이는 그리는 행위 속에서 저절로 무엇처럼 보이게 되어 버리는 상황을 현시한다. 감상자는 이 모호한 형상을 바라보며 이미지가 나를 어떻게 바라보고, 내가 어떻게 그 응시 속에 포섭되는지를 지각하게 된다. 최근의 작업은 그 경향을 더욱 밀어붙여, 형상을 거의 지워내면서 이미지와 감상자 사이의 긴장을 한층 더 첨예하게 만든다. 그렇게 우리의 지각은 그의 그림 곁에서 갈수록 의미를 고정하지 못하고, 이미지와 마주하는 사건 속에서 계속해서 새롭게 구성된다.
결국 김홍주의 작업은 사건의 중첩이며, 감상자의 경험 속에서 다시 시작되는 조건이다. 이러한 태도는 그의 전작들로부터 지속되어 왔다. 1970년대 ST 그룹 활동 당시 그는 동시대 아방가르드적 실험 속에서 예술의 의의를 살폈고, 이는 이후 회화가 어떤 방식으로 성립할 수 있는지를 묻는 문제로 이어졌다. 1980년대 ‘극사실’ 회화는 단순한 유행의 수용이 아니라, 재현의 극한을 시험하여 회화의 근거를 끝까지 몰아간 작업이었다. 이어 문인화가들의 서체(타이포)를 화면에 옮겨오거나, 꽃 한 송이를 섬세하게 그린 그림들 역시 구상적 묘사를 반복하지 않고, 의미의 무게를 덜어내며 언어와 기호의 문제를 불러들인 시도였다. 언뜻 서로 다른 사조와 장르를 오간 듯 보이지만, 이 모든 작업은 결국 일관된 물음, 즉 회화의 가능성을 확인하고 갱신하는 실천으로 수렴한다.
따라서 그의 궤적은 오랜 시간 꾸준히 동일한 문제를 시기마다 다른 언어로 탐구해 온 과정이라 할 수 있다. 발생, 조건, 체험, 지각은 그 문제의 변주이자, 현재의 작업으로 응축된 사유의 축적이다. 그의 작업은 형상에 대한 집착이라는 회화의 습관을 해체하며, 회화와 더불어 우리의 사유가 시작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한다. 그것은 완결된 회화로 닫히지 않고, 회화가 확장하는 사건을 기다리기 위한 예비 그 자체다. 그의 화면 앞에서 우리는 무엇을 보았는가를 묻지 않는다. 대신,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어떻게 세계를 감각할 수 있는가라는 더 근원적인 질문을 되돌려 놓는다. 이미지를 무한히 생산하고 소모하는 시대에, 김홍주의 회화는 지워지고 남겨진 흔적을 통해 세계와 다시 관계 맺는 하나의 제언이다.
작가소개
김홍주 (b.1945)
김홍주 작가는 1973년 ST 그룹에 가입하면서 당대 전위적 경향을 따라가는 개념적 오브제 작업을 시도했으나, 1975년 즈음부터 실물 오브제와 그려진 이미지를 결합한 회화 작품을 발표하면서 이른바 극사실주의 경향의 작가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1978년에 첫 개인전을 개최했고, 1980년대 중반부터 인물이나 풍경 등을 주요 소재로 하여 밀도감 높은 독특한 이미지를 그려내기 시작했다. 198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 중후반 사이에는 흙덩이나 지형, 건축물, 글자, 배설물 등의 이미지로 중층적 이미지를 형성하면서 여러 조형적 실험이 시도되었다. 1990년대 중후반부터는 꽃 한 송이 등의 형상을 세밀한 붓 터치의 집적으로 채운, 촉각적 감각을 극대화한 회화를 제작했다. 2000년대 이후로는 특유의 세필 시법을 심화시켜 나갔고, 2010년대부터는 세필이 캔버스 천 표면에 부딪힐 때 느껴지는 감각에 집중하면서 그림을 그릴 때 경험되는 접촉 감각을 표현하고자 하는 촉지적 회화 작업으로 나아가고 있다. 1978년 한국일보사 주최 한국미술대상전에서 최우수 프론티어상을 수상했고, 1988년에는 서울미술관이 주관하는 ‘1987년의 문제작가’로 선정되었으며, 1991년에는 토탈미술대상전에서 토탈미술관장상을 수상했다. 이후 2005년 이인성 미술상(대구광역시), 2006년 파라다이스상(파라다이스 재단), 2010년 이중섭 미술상(조선일보사) 등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