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nter Solitude: 김종학

만감이 교차하는 순간이다. 지난 화업 50년의 세월 중 처음으로 선보이는 김종학의 설경 전시는 마치 수백년이 넘은 명화를 발견한 경이로움과 노작가의 인생을 눈앞에서 마주한 듯한 숙연함을 느끼게 한다.
 
조현화랑은 2015년 연말을 맞이하여 김종학 작가의 ‘설경(winter solitude)’을 통해 한국 현대 미술의 중요한 흐름을 다시 짚어 보는 계기를 마련하고자 한다. 이번 전시는 지난 2011년 과천 국립 현대 미술관 회고전 이후 시도되었던 김종학 작가의 다시보기 프로젝트에 이어 그 정점을 보여줄수 있는 소중한 자리가 될것이다.
 
김종학 작가의 컬렉션중 하나인 농기구를 설치물로 재해석 했던 ‘희수(喜壽)-진정(眞情)’展 (2013)을 비롯하여 딸에게 썼던 편지를 재구성하여 보여주었던 ‘다정(多情)’展(2012), 김종학 작가의 안목으로 선택되어진 보자기展와 나무기러기展(2013)는 현대 미술의 감동을 뛰어넘는 높은 예술적 경지를 보여주었다. 그리고 지난6월 남서울 시립미술관에서 열린 김종학 작가의 ‘ 창작의 열쇠’展(2015)를 통해 예술을 향한 강한 사랑과 집착은 관객들에게 꽃의 화가가 아닌 비로소 김종학을 다시 볼수 있게 해준 중요한 열쇠가 되었다.
 
이번에 보여지는 김종학 화백의 작품은 지금까지 보여준적없는 미발표된 작품과 이번 전시를 위해 그려진 신작 중에 엄선하여 오롯이 ‘설경’을 보여주고자 한다.
 
겨울이 가지고 있는 의미는 다양하다. 어떤 이들에게는 공포의 대상이자 생생한 삶의 터전일 것이고 동면을 하는 동물들에겐 깊고 조용한 안식의 시간이다. 또한 겨울의 추위는 봄에 꽃을 피울 식물에게 이겨야할 극복의 대상이자 튼튼하게 꽃봉우리를 피우게 하는 자양분이 되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 하고 겨울은 춥고 어둡고 길다. 그런 겨울을 작가는 가장 아름다운 절기라고 했다. 화장하지 않은 민낯이며 숭고한 자연의 골격이라고 했다. 설경이 가진 침묵은 마치 성당의 고요함과 같다고 했다. 요동치는 내면을 설악의 하얀눈이 덮고 있는 것이다. 구상작가로 불린 50 년의 세월이지만 김종학 화백의 설경은 서사와 대조되는 ‘순수(純粹)의 예술’이며 스토리를 감춘 ‘시(詩)의 예술’과 다름이 없다. 그렇기에 그의 인생에서 고독한 겨울의 절기는 고혹적으로 보이고 고요한 분위기는 엄숙함을 자아낸다. 설경은 곧 여든이 되는 작가의 인생의 시기와 비슷하게 비춰진다. 감정 기복에 영향을 받지않고 담담하게 그려나가는 그의 필력은 젊은 시절의 그것과 사뭇 다르다. 춤을 추듯 그려나간 그의 필력 보다 천천히 눈위를 걸어가는 듯 떨리는 필력은 더 농후하고 짙다.
 
이번 겨울 전시를 위해 조현화랑에서는 올해 봄부터 아카이빙(archiving) 조직을 정비하고 본격적으로 준비하였다. 총 40여점의 작품이 메인전시장에 전시되며, 동시에 인터뷰 영상이 곳곳에 설치 된다. 그리고 작가에 대해 입체적으로 보여줄수 있는 스튜디오 현장까지 그대로 공개함으로써 총 세가지의 섹션으로 나누어져 있다. 전시장에 전시될40여점의 작품은 가로 2 미터가 넘는 대형작품부터 소반에 그려진 소품까지 각 작품마다 그 특징이 뚜렷하게 나타나는 다양한 겨울풍경을 두루 선보인다. 먼저 설악의 바위산이 장엄하게 표현된 두터운 마티에르는 붓으로 그려나간 흔적조차 보이지 않는다. 직접 모래를 안료와 섞어 무심하게 바른 행위는 물감으로 표현될수 없는 질감에 대한 작가의 끊임없는 도전이 엿보인다. 모든 추상의 모태인 양 자연의 선들을 과감하게 생략하고 펼쳐 나간 선들은 오히려 설악산의 민낯을 보듯 당당해 보인다. 이는 김종학 화백의 설경이 동양화와 자주 언급되는 부분과 맞닿아 있는 지점이다. 보여진 그대로를 그리는것이 아니라 뼈대만 남기고 생략하는 것이다. 비움이 채움을 대신한다.
 
매우 속도감있게 그려나간 설경작품은 요동치는 내면이 그대로 반영되는 듯하다. 관객의 눈이 따라갈수 없을 정도로 붓의 속도가 빠르고 형태가 해체되어 있으며 의지가 배제되어있다. 설경이라는 주제를 벗어난다면 이는 단지 행위와 리듬만이 남아있는것이다. 추상의 몸짓을 정리하는것은 시공간을 일깨워주는 유유자적한 새들의 날개짓 뿐이다. 곧 여든을 앞둔 김종학 화백은 세월에 따라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바뀌듯 자연을 바라보는 눈도 달라진다고 했다. 죽어가는 풀잎도, 눈이 덮혀 기울어진 모습도, 돌도, 냇가도 지루하지 않고 재미 있다고 했다. 그렇게 설경은 작가의 세월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이번 전시는 준비과정을 보여주는 영상을 프로젝터와 모니터로 곳곳에 설치된다. 일주일간 작가와 함께 동행하면서, 작업하는 과정 외에도 일상적인 대화들을 고스란히 담았다. 그림을 그리기 위해 색을 고르는 모습, 물을 버리거나 옮기는 모습, 혹은 밥을 먹거나 산책하는 모습등 김종학 화백의 하루하루를 담았다. 곧 여든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하루 종일 화실에 나와 붓을들고 고민하는 모습을 엿 볼수 있다. 감정기복의 고저(高低)에 의지하며 작업해왔던 김종학 화백은 설경을 준비하면서 마치 겨울이 가지고 있는 그 고요함속으로 들어가 천천히 꾸준히 끊임없이 작업했다. 마치 그림을 처음 시작했던 젊은 시절 처럼 자신의 작품 앞에서 고민하기도 했고 때로는 손이가는대로 붓을 들기도 했다. 동영상 작업에 앞서 김종학 작가를 ‘꽃의 화가’라는 단편적인 시각이 아닌 입체적으로 보여줄수 있도록 스튜디오를 마련하고 이번 전시에 공개한다. 그곳에는 작가가 직접 작업한 흔적도 남겨 있지만 유아기때부터 학창시절, 동시대의 작가들과 함께했던 흔적들까지 사진으로 보여준다. 이 기회를 통해 작가의 삶이 어떻게 작업과 연관지을수 있는지 눈으로 확인할수 있는 중요한 자리가 되길 기대한다.
 
‘꽃의 화가’ 김종학화백의 이번 설경전시에는 ‘꽃’이 등장하지 않는다. 화려한 색채도 없다. 붉게 타오르는 꽃들이 잉태되기 전 몇천년 잠들어 있는 눈덮힌 설악으로 안내하고자 한다. 오로지 자신의 몸만 드러내는 김종학의 설경전시를 통해 관객이 작품앞에서 귀를 기울이길 기대한다. 들어보라! 고요함 속에서도 무던히도 내리는 눈의 소리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