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현화랑은 ‘숯의 작가’라 불리며 숯과 수묵을 통해 한국의 전통성과 정체성을 이야기하는 이배 작가의 개인전을 개최한다. 이번 전시는 조현화랑의 달맞이와 해운대 공간에 동시 진행된다. 달맞이 공간에서는 공간 전체를 아우르는 설치와 오일 파스텔 작업을, 해운대 공간에서는 붓질의 시리즈별 작품과 조각, 수채화 작품을 선보인다. 흑과 백으로 절제된 색을 통해 두 개의 공간을 하나로 연결하며, 회화와 드로잉, 조각, 대형 설치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기법과 형식으로 공간을 재해석한 신작을 통해 이배의 작품세계를 한눈에 볼 수 있다.

숯에 담긴 한국의 정신성

이배 작가는 1989년도에 한국을 떠나 30여 년간 파리에서 활동했다. 당시 작가에게 가장 큰 과제는 정체성을 찾는 문제였다. 어느 날 우연히 파리에서 숯을 만나게 되었고, 그 숯에서 황토길을 걸으며 자연을 벗 삼아 성장했던 유년 시절을 떠올리게 된다. 그때부터 숯은 작가에게 ‘나의 고향, 나의 정체성’을 깨닫게 한 매개체이자 한국적 정서를 함축한 상징이 되었다. 이후 꾸준하게 연구하고 제작해온 숯과 수묵 작업에는 색이 배제되어 왔다. 흑색으로 수렴되는 동양의 작품들은 현실을 초월한 정신성에 집중했기 때문이다. 고결함을 상징하는 문인화의 주된 화제인 사군자를 보아도 난초와 대나무를 굳이 녹색으로 칠하지 않는다. 자연을 표현하되 색을 넣으면 오히려 현실성에 젖어 메시지는 반감된다. 작가가 다루는 숯 덩어리는 무한한 검정의 획이 되고 공간은 티 없이 깨끗한 여백이 된다. 그렇다고 여백을 마냥 비워두는 것은 아니다. 해운대 전시장에 설치된 평면 작품들을 보면 투명 미디엄을 여러 차례 반복하며 쌓아올림으로서 미세한 레이어가 중첩되어 채워짐을 볼 수 있다. 흑백의 모노톤으로 한국적 정신성을 발현시키면서도 화면과 공간을 채워 밀도를 확보하였다. 또한 숯의 형상을 브론즈로 재현한 〈lssu du feu scrulpture〉작품은 연약한 물성에 강인함을 심어 거칠고 투박하지만 그 안에서 발견되는 세밀한 미감을 표현하였다.

 

시간성과 신체성

시간성과 신체성은 이배 작업에 큰 영역을 차지하고 있다. 작가에게 시간성은 ‘멈춤’이 아닌 ‘지속’과 ‘영속’이다. 작가가 숯으로 사용하는 소나무의 수명은 길게는 100년이 넘는다. 그 소나무가 죽어서 썩기 전에 숯으로 구워지면 생명은 몇 천 년으로 연장된다. 불로 태우는 격렬한 과정 이후 미래의 시간성마저 받아들이는 것이다. 또한 우리의 매 순간은 우연의 연속이라 할 수 있고 그것이 축적되어 의미로 바뀌게 된다. 계속해서 움직이고자 노력할 때 생존하고 발전할 수 있다. 결국 숯은 영원이라는 시간의 응축을 상징하며, 우리의 삶에서 계속 생동하고 지속되는 태도를 대변하는 오브제인 것이다.

신체성은 서예작업 전반에 흐르고 있는 요소이다. 드로잉 작업 〈붓질(Brush stroke)〉은 ‘기운생동’의 요소와 감각을 우선시 하고 있다. 추상적인 형태의 드로잉은 적당히 메말라 선명하게 노출된 붓 자국으로 몸의 미세한 움직임과 작가의 호흡이 그대로 전해진다. “예술이란 에너지이고 또 생동감이 중요하다”는 작가의 말에서 사람의 몸짓, 호흡, 리듬이 높은 경지로 추구되어온 동양의 예술관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음을 알 수 있다. 수많은 결이 모인 붓 자국은 숯의 결과도 닮아 있다. 숯의 물질성, 검정 물감의 붓 자국이 정신과 신체가 조응된 일관된 결을 시각화 한다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공간과의 조응

이번 전시에서 작가는 조현화랑 공간에 맞는 ‘회화-인스톨레이션’을 적극 시도하였다. 달맞이 전시장 1층 공간 자체가 캔버스인 것처럼 벽과 바닥을 종이로 씌어서 그림 공간을 설정했다는 점에서 이전의 전시들과 차별화된다. 관람객은 그림의 무대인 종이 위에 올라 작품의 일부가 될 수 있으며, 전시장 환경의 섬세함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다. 달맞이 2층에 설치된 작품 〈불로부터(Issu du feu white line)〉는 검정 숯으로 화면을 만들고 그 위에 오일 파스텔을 활용하여 흰 선들을 그렸다. 나뭇결이 그대로 드러나는 메마르고, 부서지기 쉬운 숯 조각을 깎고 붙여 평면적으로 조합한 표면 위에 흰색의 드로잉 라인을 더했다. “숯은 나에게 있어 변하지 않는 바탕이 되고 나의 감성은 손을 빌려 선을 새긴다”는 작가의 말을 해석하면 숯의 물질성과 흰 선의 드로잉이 만나 흑과 백, 그리고 선과 여백의 관계성에서 음과 양, 밝음과 어둠, 존재와 부재의 개념이 공존함을 이야기 한다. 또한 작가는 바닷가와 맞닿아 있는 조현화랑이 갖는 특성을 생각하면서 공간 자체를 하나의 화면으로 해석하였고 부산 밤바다에 비가 내리는 풍경을 연상하였다.

 

전시 제목 Oblique는 프랑스어로 ‘비스듬히’라는 의미와 함께 무언가를 ‘움직인다’는 뜻의 형용사로도 쓰인다. 현대미술을 ‘만남의 과정’이라고 이야기 하는 작가는 자신의 작품이 관객과 작가 사이에서 작동하고 생동하며 연결하는 역할을 희망해 왔다. 전시장이라는 특수하게 설정된 공간에서 사람들은 현실을 잊어버리고 새로운 세계에 심취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번 조현화랑의 전시가 숯을 이용한 한국의 전통성에 대해 일관되고 지속성 있는 태도로 임하는 이배 작가의 작품을 만나는 것을 넘어 작가와 함께 호흡하고 공감할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